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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조금 더 과감하게 표현하면 지금의 평범한 사람들은 과거의 왕이나 귀족조차 쉽게 누리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현대 사회에도 전쟁, 빈곤, 질병, 범죄, 불평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 세계 어디에서나 모두가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인류의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오늘날 평범한 사람이 누리는 생활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과거를 생각해보자. 전쟁은 지금보다 훨씬 일상적이었다. 농업 생산량은 기후와 자연재해에 크게 좌우되었고, 흉년이 들면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야 했다. 의료기술은 제한적이어서 지금이라면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나 감염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흔했다. 깨끗한 식수와 위생적인 하수시설 역시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과 중진국에서 평범한 사람은 적어도 기본적인 생활에서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편의를 누린다. 집에 수도가 들어오고, 따뜻한 물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으며, 화장실과 욕실이 집 안에 있다.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고, 세탁기를 사용하고, 전기를 이용해 밤에도 생활할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과도 즉시 소통할 수 있고, 몇 번의 클릭만으로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화장실과 욕실만 생각해봐도 현대 생활의 풍요로움이 실감난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집 안에 개인 화장실과 욕실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 전체에서 이것은 결코 당연한 조건이 아니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도시의 위생환경은 매우 열악한 경우가 많았고, 상하수도와 공중위생의 발전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 속한다.

우리는 매일 따뜻한 물로 씻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실내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한다. 그런데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것을 특별한 혜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이 생기면 그것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생활은 엄청난 문명의 성취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음식이다. 과거의 인간에게 음식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올해 농사가 잘될 것인지, 겨울을 버틸 수 있을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반면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음식은 생존을 넘어 취향과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어느 식당에 갈지 선택하고, 배달음식을 주문하고, 여러 나라의 음식을 경험한다. 수백 년 전 사람에게는 왕이나 귀족에게도 쉽지 않았던 음식의 다양성을 평범한 현대인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평범한 개인은 과거의 귀족보다 더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현대인이 과거의 귀족보다 행복하다’는 주장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행복은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현대인의 역설이 발생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으면 그것에 빠르게 적응한다. 처음에는 기적처럼 느껴졌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일상이 된다. 전기, 냉장고, 에어컨, 인터넷, 스마트폰, 자동차, 상하수도 같은 것들이 모두 그렇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거의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풍요가 증가할수록 감사가 반드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풍요에 익숙해지면서 부족함에 더욱 민감해질 수도 있다.

예전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사람이, 오늘날에는 인터넷 속도가 조금 느리다는 이유로 불만을 느낀다. 과거에는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었겠지만, 현대인은 실내 온도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낀다.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서 고통을 상당 부분 제거해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불만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한 환경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현대의 풍요를 제대로 누리면서도 그것에 정신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는 것. 더 많이 가지는 것과 더 잘 사는 것이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철학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의심을 통해 자신의 사고를 다시 세우려 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한 번쯤 의심해보는 태도는 현대인의 삶에도 필요하다.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잠시 멈추고 바라보면, 사실 그것들이 얼마나 거대한 문명의 결과인지 깨달을 수 있다.

칸트

칸트가 강조했던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 역시 생각해볼 만하다. 외부의 욕망이나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에 끌려가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남들이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삶을 불행하다고 규정할 필요는 없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현대인의 욕망을 바라보는 데 의미가 있다. 인간은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얻으면 곧 새로운 것을 원한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의 만족은 짧고, 곧 새로운 결핍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획득하는 것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니체

니체는 삶을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가는 태도를 중요하게 보았다. 현대의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물질적인 결핍이 줄어든다고 해서 정신적인 문제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 사회가 유토피아인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물질적 생활조건만 놓고 보면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적어도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왕과 귀족도 쉽게 누리지 못했던 위생, 의료, 정보, 교통, 음식, 난방과 냉방, 통신의 혜택이 주어진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단순히 물건이 많고 편리한 곳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비교가 있으며, 불안과 외로움이 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있다. 아무리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어도 인간의 정신적 문제까지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역사상 가장 유토피아에 가까운 시대에 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지금 가진 것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

아침에 눈을 뜨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 따뜻한 집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 냉장고에 음식이 있다는 것, 집 안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는 것, 멀리 있는 사람과 즉시 연락할 수 있다는 것, 책과 지식에 거의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만들어온 거대한 문명의 결과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행복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얻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데에도 있을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원하는 마음을 버릴 필요는 없다. 발전과 욕망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의 풍요를 누리면서도 끊임없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만족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이 가지는 능력뿐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아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삶은 완벽하지 않다. 세상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성취까지 당연한 것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수백 년 전의 인간이 꿈꾸었을 삶을 우리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냉장고가 돌아가고, 밤에도 불을 켤 수 있고,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하루.

어쩌면 우리는 이미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다.

문제는 유토피아가 눈앞에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유토피아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