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생은 결핍과 권태 사이의 시소일까? 살다 보면 이상한 순간이 찾아온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원할 때는 그것만 가지면 행복할 것 같다. 돈을 더 벌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원하는 사람과 만나면, 더 좋은 집에서 살면, 여행을 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막상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기쁨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렇게 갖고 싶었던 물건도 며칠 지나면 익숙해지고, 오랫동안 준비한 여행도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어렵게 이룬 목표도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면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바라보면서 바로 이 반복에 주목했다. 그의 철학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통받으며, 막상 이루어지면 곧 익숙해져 다시 새로운 것을 원한다. 그리고 특별히 원하는 것이 사라지면 이번에는 지루함과 공허함이 찾아온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아주 쉽게 표현하면 결핍과 권태 사이를 움직이는 시소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쇼펜하우어가 단순히 인생은 불행하다고 말하고 끝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철학을 오늘날의 삶에 적용하면 욕망을 조금 줄이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속도를 늦추며, 작은 즐거움을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은 왜 원하는 것을 얻어도 오래 행복하지 못할까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에는 의지(Wille)라는 개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나는 이것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의식적인 의지력과는 다르다. 인간과 생명체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욕망과 충동에 가까운 개념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외로우면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면 성취를 원하고, 돈이 부족하면 돈을 원한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을 원한다.
문제는 욕망이 끝나는 순간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월급이 300만 원일 때는 400만 원을 원하고, 400만 원이 되면 500만 원을 생각할 수 있다. 좋은 차를 갖고 싶었던 사람이 차를 사고 나면 더 좋은 차가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물질적인 것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도 마찬가지다. 한 번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만, 곧 그 칭찬에 익숙해지고 다시 더 많은 인정이나 더 높은 평가를 원하게 된다.
결국 욕망은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망으로 이어지기 쉽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간의 고통은 바로 이 구조와 연결된다.
그래서 인생은 결핍과 권태 사이를 오간다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설명을 현대적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원한다 → 부족하다 → 괴롭다 → 얻는다 → 잠시 만족한다 → 익숙해진다 → 지루하다 → 다시 원한다.
원하는 것이 없으면 결핍 때문에 괴롭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 만족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 권태가 찾아온다.
그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설명한 삶의 구조에는 바로 이런 욕망과 만족, 그리고 권태의 반복이 등장한다.
그래서 흔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의 시계추”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의 삶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철학자였지만, 그의 분석은 현대인의 심리를 생각할 때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이 계속될 것이라는 착각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대사회에서는 이 시소가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쇼펜하우어가 살던 19세기보다 욕망을 자극하는 장치가 훨씬 많다.
SNS를 보면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 어디를 여행하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집에서 사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온라인 쇼핑에서는 하루 종일 새로운 상품을 볼 수 있고, 영상 플랫폼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가 추천된다.
어제까지 갖고 싶었던 것이 오늘은 평범해지고, 오늘 처음 본 것이 내일의 새로운 욕망이 된다.
그래서 현대인의 문제는 단순히 원하는 것이 많다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원하는 주기가 너무 짧아졌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단순한 염세주의가 아니라 욕망의 구조를 관찰하는 하나의 심리학적 사고실험처럼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욕망을 모두 없애야 할까?
여기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현대적으로 적용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가 궁극적으로 말한 것은 단순한 소확행을 즐기자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철학에서 더 급진적인 해결책은 의지를 부정하고 욕망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에 가까우며, 이는 금욕주의와 연결된다. 그는 예술적 관조와 연민을 중요한 완화 방식으로 보았고,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소확행을 추천했다고 말하면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그의 급진적인 결론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욕망을 관찰하고 필요 이상의 집착을 줄이는 부분을 일상에 적용해볼 수 있다.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것. 이 정도가 현실적인 적용에 가깝다.
소확행은 쇼펜하우어식으로 보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퇴근하고 좋아하는 커피를 한 잔 마시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커피 한 잔이 인생을 바꿔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이 없다.
이 커피를 마시면 내 인생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기대도 없고,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도 없다.
그냥 지금 커피의 향과 맛을 즐기는 것이다.
산책도 마찬가지다.
주말에 아무 목적 없이 동네를 걷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책을 읽거나, 햇빛을 받으면서 잠깐 쉬는 것 역시 거대한 목표와 연결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이런 작은 즐거움은 욕망을 크게 부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제의식과 의외로 잘 맞는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해지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제대로 경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가’하는 것보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행복을 적극적인 쾌락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많은 순간이 사실은 욕구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배가 고팠다가 식사를 하면 행복하고, 피곤했다가 잠을 자면 개운하고, 걱정거리가 해결되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것을 일상에 적용하면 꽤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엄청난 즐거움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것을 하나씩 줄이는 것도 삶의 만족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쓸데없는 인간관계를 줄이고, 지나친 SNS 사용을 줄이고, 필요 없는 소비를 줄이고, 매일 비교하는 습관을 줄이고, 너무 많은 약속을 줄이는 것이다.
행복을 더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빼는 것이다.
갖고 싶은 것과 있으면 좋은 것을 구분해보기
쇼펜하우어를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욕망을 구분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수 있다.
- “정말 필요한가?”
- “이것이 없어서 지금 불행한가?”
- “한 달 뒤에도 갖고 싶을까?”
- “이미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을 한다고 해서 소비를 모두 포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정말 원하는 것을 살 때는 더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문제는 남들이 가지고 있으니까 나도 가져야 한다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은 나 자신의 필요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비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비교하지 않는 삶은 현대사회에서 중요하다
쇼펜하우어는 명예, 평판, 사회적 평가 같은 외부적인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그의 실천적 저작인 『인생론』에는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같은 삶의 요소를 구분해 논하는 부분이 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SNS와 연결된다.
다른 사람이 해외여행을 가면 나도 가고 싶고, 다른 사람이 좋은 차를 사면 나도 사고 싶고,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내 삶이 갑자기 초라해진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평범한 일상을 비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비교 대상을 없애는 것 자체가 행복을 높이는 방법이 된다.
SNS를 조금 덜 보고,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줄이는 것만으로도 욕망의 양이 줄어들 수 있다.
혼자 있는 능력
사람은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을 찾는다.
휴대폰을 확인하고, 영상을 틀고, 음악을 듣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이것은 권태를 더욱 크게 만들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면 외부 자극으로 권태를 계속 밀어내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의 내면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 휴대폰을 내려놓고 산책을 하거나, 카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거나,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심심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심심함 자체가 편안해질 수 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해법
예술(Arts)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단순한 장식이나 오락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에게 미적 경험은 욕망에서 잠시 벗어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바라보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 이것을 가져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떨어져 대상을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는 승진할 필요도 없고, 돈을 더 벌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그저 음악을 듣는다.
쇼펜하우어에게 이런 욕망으로부터 잠시 떨어지는 관조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적으로 바꾸면 미술관에 가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영화에 몰입하는 것, 자연을 바라보는 것, 좋은 책을 읽는 것 역시 단순한 취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불교와도 연결된다
쇼펜하우어 철학을 이야기할 때 불교와의 유사성도 자주 언급된다.
그는 인도 철학과 불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사상에서 자신의 철학과 통하는 부분을 발견했다. 다만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불교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서로 역사적 맥락과 개념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공통된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야 행복한가?”
불교에서는 집착과 갈애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쇼펜하우어 역시 끊임없는 욕망이 고통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그래서 둘을 함께 생각하면 재미있는 생활 원칙 하나가 나온다.
원하는 것을 무조건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내려놓는다.
스토아 철학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스토아 철학도 재미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씨를 통제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으며, 이미 지나간 과거도 바꿀 수 없다.
반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방향으로 문제를 바라봤다면, 스토아 철학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방향으로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둘을 합치면 상당히 실용적인 생활철학이 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내려놓고, 내가 지나치게 원하는 것도 한 번 의심해본다.
그러면 삶에서 불필요한 긴장이 상당히 줄어든다.
에피쿠로스는 의외로 작은 행복과 잘 어울린다
또 다른 흥미로운 철학자는 에피쿠로스다.
에피쿠로스는 흔히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치와 향락을 추구한 철학자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그는 욕망을 구분하고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친구들과 소박한 식사를 하고, 필요한 만큼 먹고,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평온한 상태를 추구하는 삶에 가까웠다.
이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소확행과 잘 연결
비싼 레스토랑에 가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집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고, 해외여행을 가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공원을 걷는 것도 좋다.
행복의 가격을 낮추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강력한 전략이다.
행복을 위해 반드시 비싼 물건과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다면 행복을 얻는 비용이 계속 올라간다.
반대로 작은 것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면 행복의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니체는 여기서 정반대의 질문을 던진다
쇼펜하우어가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향을 이야기했다면 니체는 오히려 삶의 고통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는 것이다.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없애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있다고 해서 삶이 실패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려움까지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비교하면 재미있다.
쇼펜하우어가 욕망을 줄이면 고통도 줄어든다는 방향으로 간다면, 니체는 보다 적극적으로 삶의 고통까지도 감당하면서 나 자신을 만들어가라는 방향으로 간다.
둘은 완전히 다른 답을 내놓지만, 출발점에는 비슷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카뮈는 아예 다른 답을 내놓는다
20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도 이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 완벽한 의미가 주어져 있느냐는 질문이다.
만약 우주가 우리에게 명확한 목적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뮈의 답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조리함을 인식하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철학자마다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이 상당히 다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줄인다.
에피쿠로스는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고 평온함을 추구한다.
스토아 철학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을 줄인다.
니체는 삶의 고통까지 긍정한다.
카뮈는 완벽한 의미가 없더라도 삶을 계속 살아간다.
어느 하나가 무조건 정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상황에 맞는 부분을 가져오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실제 생활에서는 어떻게 적용할까
결국 철학은 책 속에만 있으면 재미있는 지식에 그친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일상에서 활용한다면 거창한 금욕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아침부터 “나는 모든 욕망을 버리겠다”고 선언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작은 변화가 현실적이다.
1.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 하루 정도 기다려본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라면 하루가 지나도 정말 원하는지 확인한다.
2.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의식적으로 확인한다
매일 사용하는 휴대폰, 집, 침대, 건강, 가족, 친구처럼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바라본다.
3.SNS와 비교를 줄인다
다른 사람의 삶을 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새로운 욕망도 늘어날 수 있다.
4.작은 즐거움을 일부러 즐긴다
커피 한 잔, 산책, 음악, 맛있는 음식, 햇빛, 좋은 책처럼 돈과 시간이 많이 들지 않는 즐거움을 제대로 경험한다.
5.목표를 달성한 뒤 바로 다음 목표를 만들지 않는다
시험에 합격하고 바로 다음 시험을 준비하거나, 프로젝트를 끝내자마자 또 다른 목표를 세우기보다 잠시 멈춰서 내가 이것을 해냈구나라고 느껴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족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더 나아지라고 이야기한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좋은 집에 살아야 하고, 더 좋은 차를 타야 하고, 더 많은 경험을 해야 하고,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야 한다.
성장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성장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 나아지고 싶으면서도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면 삶의 구조가 상당히 달라진다. 지금보다 더 좋아지고 싶다는 마음과 그래도 현재의 삶이 나쁘지는 않다는 마음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어렵고 간단한 문제지만 할 수 있다면 철학을 실제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봤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만족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욕망이 시작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원하는 것이 사라지면 권태가 찾아온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하지만 이 생각을 꼭 절망적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이것을 얻으면 정말 오래 행복할까?”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굳이 더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아도 지금 즐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욕망과 나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생긴다.
그리고 그 거리가 중요하다.
욕망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욕망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그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삶은 계속 움직인다.
원하는 것이 생기고, 얻고, 익숙해지고, 또 다른 것을 원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시소에서 완전히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방법은 어쩌면 시소가 움직이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올라갈 때마다 더 높은 곳만 바라보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가끔은 지금 내려와 있는 자리에서 주변을 바라보고, 이미 손에 들어온 것을 즐기고,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는 짧은 순간을 충분히 느껴보는 것이다.
맛있는 치킨 한마리 먹고,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을 즐기며, 햇빛 아래를 걷고, 친구와 웃고, 집에서 편안하게 쉬는 것.
인생 전체를 바꿀 만큼 대단한 사건은 아니지만, 삶은 어쩌면 이런 작은 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오늘날의 언어로 가장 현실적으로 바꾼다면 이런 말이 될지도 모른다.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기 전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고 무언가를 원할 때마다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없어서 불행한 것일까, 아니면 이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욕망에 끌려가는 삶과 내가 선택하는 삶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생길 수 있다.